[아쿠다자] 달보드레한 그대
[아쿠다자] 달보드레한 그대
방 안에서는 굳이 코트를 걸치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아무리 다자이가 선물한 세상에서 한 벌뿐인 코트라고는 해도, 침대 위에서까지 그 칙칙한 검은색 옷을 어깨에 두르고 있다면 다자이가 달려들어서 훈계할 것이 분명하니. 아쿠타가와는 제 손으로 벗어서 걸어둔 코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언제나 아쿠타가와의 어깨에 감겨 나생문을 뿜어내던 코트는 얌전히 옷걸이에 걸려있는 상태였다.
다자이가 저 코트를 준 것이 벌써 몇 년 전이었던가.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한 어린 생명에게 처음으로 주어진 선물은, 지금까지도 소중하기만 한 물건이었다. 특히 그 선물을 준 상대 역시도 소중한 사람이었기에 더더욱. 잠시 생각에 잠기던 아쿠타가와의 고개가 스르르 숙여졌다.
우리 관계의 시작은 뭐였을까.
무릎에는 다자이가 머리를 기댄 채 나른한 표정으로 낮잠을 자고 있었다. 곤히 잠들었는지 꾹 감긴 다자이의 두 눈을 보며 아쿠타가와는 머리를 굴렸다. 시작이라. 이제는 제대로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소중하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도리어 한 순간 한 순간이 너무나도 소중해서, 사소한 것에 연연하지 않고 다자이 그 자체만을 기억하게 되었을 뿐.
아쿠타가와는 조용히 다자이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약간 곱슬기 있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매끄럽게 흩어지는 건 꽤나 기분 좋은 감각이었다. 현재 다자이의 모습은 글자 그대로 사랑스러운 연인이다. 만약 여기서 감히 실례를 무릅쓰고 다자이 씨의 이름을 입에 올린다면, 새까맣고 깊은 두 눈을 조용히 뜨며 소생과 마주하고 예쁘게 웃어 주시겠지.
그것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가슴 벅차오르는 광경이었다.
“아쿠타가와 군?”
부드러운 손길에 눈을 뜬 다자이가 잠결에 입술을 열었다. 눈을 떴다고는 하지만 거의 감긴 채로 아직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다자이 치고는 정말로 빈틈이 가득한, 다시 말하자면 편안해 보이는 모습. 개나 소나 쉽게 눈에 담을 수 있는 모습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여기에 있습니다.”
“자네는 자지 않는 건가. 모처럼의 휴식인데 말이지.”
“다자이 씨의 얼굴을 눈에 담고 있었습니다.”
아쿠타가와의 목소리에는 높낮이가 없었다. 본인이 입에 답은 말에 대한 일말의 부끄러움조차 없는 투에,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것은 오히려 다자이였다. 늘 예상치도 못한 행동들로 언제나 신선함을 주고 있는 부하, 아니 연인이기는 하지만 이런 말도 술술 할 정도였던가. 다자이는 두 눈을 깜박거리며 아쿠타가와를 올려다보았고, 그 모습은 아쿠타가와를 강하게 흔들어놓기에 충분했다. 언제나 허공을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지던 두 눈이 자신만을 올곧게 담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심장의 고동은 적지 않게 빨라졌으니까.
아쿠타가와는 사랑스러움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다자이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포근한 행위에 다자이는 기분 좋은 웃음을 띠며 제 머리칼에 얹어진 아쿠타가와의 손에 얼굴을 부비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것과 부드러운 것이 마주치며 내는 자극은 여파가 컸다. 순식간에 두 사람 모두의 심장 한 구석이 녹아내릴 것 같을 정도로.
아쿠타가와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봤다. 다자이의 방은 언제나 다자이만큼이나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 세상 어디에도 이보다 더 이 사람의 방이라고 할 수 있는 공간은 없을 것이다. 단 하나, 아쿠타가와의 방과도 같은 풍경을 가진 게 바로 창가였다. 정확히는 창밖으로 보이는 저 하늘. 문득 하늘은 아쿠타가와가 다자이의 방에 있지 않아도 언제고 다자이와 함께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매개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자이의 말마따나 오랜만에 주어진 휴식이라 이건가. 답지 않게 감성으로 가득 찼다. 거기다 하늘마저 눈이 시리도록 밝았다. 아쿠타가와는 오늘 같은 하루가 계속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다자이 씨와 둘이서 느긋한 시간을 보내는, 그런…….
그런 생각을 하면 뭐하겠는가. 소생과 다자이 씨는 마피아. 그것도 요코하마의 뒷골목을 장악하고 있는 포트마피아다. 평화로운 일상이란 있을 수가 없는 법.
아쿠타가와는 경계 어린 표정으로 총구를 이쪽으로 향한 적의 등허리를 찍어 내렸다. 망설임 없이 나생문으로 휘갈긴 여파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날아가는 적으로 보아 분명 컸다. 그럼에도 앞에 선 다자이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아서. 아쿠타가와는 습관적으로 입술에 손을 올려 작게 터져 나오는 기침을 막았다.
비명 한 번 내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처박힌 적이 채 일어서기도 전에 근처에 서 있던 다자이가 그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기다란 손가락이 머리카락에 휘감긴 채 거세게 흔들어대자 머리통은 따라 힘없이 젖혀졌지만 다자이는 그런 남자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조용히 눈으로 훑을 뿐이었다.
“이 자는 일개 말단 사원이군. 이렇게 약해서야 마피아는 해먹겠는가?”
“소생이 강한 것이오.”
머리채가 잡힌 남자는 입술이 뜯겨나갈 정도로 이를 악무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에, 다자이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 대답을 내놓는 것은 아쿠타가와 뿐이었다. 다자이는 남자에게 향해있던 고개를 돌려 아쿠타가와를 응시했다. 오늘 아침에 너무 약하게 매드렸나. 아쿠타가와는 다자이의 오른쪽 눈에 감긴 붕대가 유독 오늘따라 헐렁해 보인다는 영양가 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무례하게도 말이다.
“재미있는 소리인걸, 아쿠타가와 군. 자네는…”
“…….”
“물러 터졌어.”
다자이의 시선이 아쿠타가와에게로 돌려진 틈을 타 머리채가 잡혀 있던 남자가 허리춤의 짧은 파이프를 휘둘렀다. 그러나 기세 좋게 움직인 그는 동시에 날아온 다자이의 발길질에 의해 머리가 다시 땅으로 처박히는 게 고작이었다. 마치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린 듯한 움직임이라고, 아쿠타가와는 생각했다. 제 자신이 강하다고 말했던 것이 민망스러울 지경이었다.
다자이는 남자의 뒤통수를 구둣발로 꾹 누른 채 수건에 더러운 걸 닦아내듯 사정없이 비벼댔다. 우드득-. 코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참지 못한 남자의 흐느끼는 소리가 터져 나왔으나 다자이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옆에 선 부하 한 명이 머쓱함에 머리를 긁적일 정도로 노골적인 소리였는데도.
“제대로 끝내지 않으면 몇 번이고 일어설 것이 분명하잖은가?”
“면목 없습니다.”
“앞으로는 확실히 끝내도록 하게. 그렇지 않으면 끝나는 건 자네 쪽일 테니.”
“귀담아 받들겠습니다.”
완벽한 저자세. 다자이의 입술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기분 좋은 호선이 그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부러 비위를 맞추기 위한 고의적인 행동들은 아니었겠지만 아쿠타가와의 태도는 언제나 다자이를 유쾌하게 만들었다. 등 뒤로 아득할 정도의 새까만 이능력을 절제 없이 휘둘러대던 아쿠타가와가 반듯하게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힐 때면 속내에 숨어있던 가학심 마저 들곤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생각보다 훨씬 자극적이었고, 만족스러웠다.
다자이는 남자의 머리를 발로 차 발밑에서 치워내고 주머니에 꽂혀있던 손을 꺼내 팔짱을 꼈다. 이곳의 정리는 끝난 듯한 분위기에 멀찍이 서서 잔류들을 처리하던 부하 하나가 다가와서 머리를 숙이는 것은, 기다리는 것을 싫어하는 다자이의 성격을 아는 모두의 몸에 베인 습관이었다.
“이 자에게서 얻어낼 것은 없겠는걸. 보나마나 쓸데없는 잡 지식 일걸세.”
“…어떡할까요? 다자이 님.”
다자이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며 입 꼬리를 올려 웃었다.
“대가리를 잡으러 가야지.”
교언영색(巧言令色)이라는 생각을 했다는 걸 아신다면 필시 언짢아하실 터.
아쿠타가와는 다자이의 미소를 눈에 담자마자 고개를 돌렸다. 침대 위에서를 제외한 다자이의 모든 모습들은, 아쿠타가와에게는 가면처럼 보였다. 티끌만큼이라도 다자이를 안다면 다자이가 웃는 모습을 보고 사심이 없다고 평가하는 이는 없을 것이었다. 그만큼이나 흑심으로 가득해 보이는 다자이의 미소였지만 아쿠타가와는 아무래도 좋았다. 여우처럼 교묘해 보이는 그 미소마저도, 좋았다.
다만 순수한 마음으로 다자이를 좋아하기에는 두 사람이 서 있는 이 장소가 마땅하지 않을 뿐이었다.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아쿠타가와의 고개가 다시 한 번 숙여졌다.
상사에게의 경례였다.
아쿠타가와는 다자이의 뒤에 바짝 선 채로 다자이의 등을 보며 걸어갔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꽂고 휘적휘적 걸어가는 자신의 연인은 어제와는 너무나도 다른 사람이다. 그러나 다른 모습이라고 해서 자신의 마음에 변동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 분의 모든 면모를 사모할 뿐. 그러나 자신이 다자이의 모든 면을 사랑하는 것과 모든 면의 다자이가 늘 아쿠타가와를 사랑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포트 마피아의 간부로서, 자신의 상사로서 자리 잡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다자이 씨도 소생을 연모하시고 계실까? 해결할 수 없는 궁금증은 언제나 머리 한 구석에 맴돌았다.
“이 근처인가?”
“네, 다자이 님. 본거지는 여기가 틀림없습니다.”
“귀찮구만~. 그래도 오늘은 일찍 끝날 것 같지 않은가?”
다자이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허나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으신 상태. 곁눈질로 날카롭게 다자이의 상태를 캐치한 아쿠타가와는 이내 눈길을 거두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의 기분 좋은 미소는 훨씬 더 아름답고 또 빛났다는 것을 떠올리면서.
가만히 바닥을 내려다보던 아쿠타가와가 고개를 들고 다자이의 앞으로 나서며 뒤를 돌았다.
“여기는 소생이 처리하겠습니다.”
“호오? 나더러 구경이나 하라는 건가?”
“굳이 피를 볼 필요가 없으십니다.”
다자이가 입 꼬리를 끌어 당겨 씨익 웃어보였다. 같은 사람이 짓는 미소인데도 이렇게나 다를 수가 있는 건지. 싸늘함 그 자체의 미소를 눈에 담으며 아쿠타가와는 괜히 입 안이 마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신만만한데, 아쿠타가와 군.”
다자이의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은 분명 냉소 섞인 어투였다. 확실히도 명백한 조소.
“자신을 과대평가 하지 말게. 자네는 약해 빠졌어.”
“…….”
“아마 3분도 못 채우고 피범벅이 된 채 바닥에서 구를 테지.”
“아닙니다. …어째서 소생이 그리 약하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약하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자네는 약한 걸세.”
다자이가 아쿠타가와의 옆으로 걸어와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마지막 한 타를 내리는 힘이 물러 터졌고, 앞뒤를 보지 않고 달려들어 늘 서투른 판단을 하지.”
“…….”
“그렇게 실력 없는 자네에게 중요한 일을 맡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아쿠타가와의 주먹이 말없이 세게 쥐어졌다. 온몸의 피가 다자이의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에 말라비틀어지는 기분이었다.
어찌하여 당신은 언제나 소생을 이렇게까지 바닥으로 던져버리시는 겁니까. 그것도 고작 한 마디의 말로.
-인정받고 싶어서 미쳐버릴 것 같도록.
“그러니 자네는 뒤에서 말단 사원이나 맡게. 아까 그 놈 같은 피라미들 말이지.”
아쿠타가와의 고개가 더욱 숙여졌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수치스러워서도, 원망스러워서도 아니었다. 그저 그에게 이런 평가밖에 들을 수 없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져서 참을 수가 없었다.
다자이는 그런 아쿠타가와를 조용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내밀었다. 갑작스레 가까워진 얼굴에 놀란 아쿠타가와가 몸을 뒤로 빼기도 전에, 코앞에서 다자이가 웃어보였다. 생긋, 하고.
“나는 그런 형편없는 자네의 실력을 꽤나 사랑스럽게 여기고 있으니 말일세.”
서투르고,
물러 터졌고,
약해빠졌다.
다자이의 말은 무엇 하나 틀린 것이 없었다. 아쿠타가와의 눈이 느리게 감겼다 뜨이는 동안 다자이는 이미 앞서 걸어가 버린 후였다. 자신에게 맡길 수 없다는 그 중대한 일을 처리하기 위하여.
결국은 약하다는 소리였다. 결국 본인은 중요한 임무를 맡기에는 턱 없이 부족하다는 소리였다. 그런데도 그리 웃어주시는 것 하나에 멍청하게도 설레는 자신은 물러 터진 게 확실했다.
아쿠타가와는 황급히 다자이의 뒤를 쫓았다. 이를 악물었음에도 얼굴을 뒤덮은 열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소생이 너무 약해빠졌기 때문이리라.